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루터교]] 전파 ==== [[프레데리크 1세]]는 즉위 당시에는 비록 스스로 [[로마 가톨릭]]의 근엄한 수호자라고 선언하였지만, 곧바로 자신이 [[주교]] 임명권[* [[주교]] 임명은 [[교황]]의 권한이다.]을 가진다고 선언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시작하였다. 폐위된 크리스티안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크리스티안 2세의 부인 이사벨은 카를 5세의 여동생이었다.]와 로마교황청의 지원 아래 복위를 계속해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1세로서는 덴마크 내 가톨릭 세력이 크리스티안 2세에게 동조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 당연했다. 다만 당시 덴마크 내에서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이 많았는데, 귀족들은 주교가 교회법에 의한 재판으로 자신들의 권한을 침해한다고 생각하였고 농민들도 과도한 십일조 징수와 성직자 부족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 1세는 당초 약속과 달리 덴마크 내 프로테스탄트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프레데리크 1세는 [[루터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가 같은 교회를 다닐 수 있도록 명령했고, [[성경]]에 대한 [[덴마크어]] 번역도 권장했다. 또한 AD 1526년 루터교의 종교개혁가인 한스 타우센이 이단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개인 사제로 임명하여 구명해 주었고 AD 1527년부터는 덴마크 28개 도시의 가톨릭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을 폐쇄시켰다. 그리고 같은해 개최된 오덴세 종교회의에서, 가톨릭교회에서 가톨릭의 보호와 루터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자, 프레데리크 1세는 '왕의 권력과 권위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라는 이유로 거절하며 사실상 덴마크 내에서 루터교의 포교를 묵인해주었다. 다만 프레데리크 1세의 뛰어난 협상력 덕분에 그의 치세 기간동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심각한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